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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구 배움터

  • Posted by 홍기용 Count: 797 06/23/10
족구유래
족구의 특징

우리 민족 고유의 전통의 맥을 이어온 민족 구기 종목인 족구는 국내에서 태동된 유일한 구기종목으로서
90년대에 대한족구협회가 창설된 후 전국대회가 개최되었으며, 특히 "92 한강사랑 전국 족구대회를 계기로 직장인들의
폭발적인 인기와 생활체육 종목으로 범국민적인 각광을 받고 있다. 족구는 전신 운동으로서 좁은 공간에서도 별다른 장비나
도구없이 아주 간편한 옷차림에 공 하나만 있으면 재미도있고 충분한 운동효과를 얻을 수 있어 특히 시간을 따로 내기 어려운
현대 직장인의 심신수련에 활력을 불어넣는 좋은 운동이다. 더욱이 족구는 다른 종목과 달리 규칙이 간단하기 때문에 쉽게
배울 수 있다.


족구의 유래

1)

삼국시대부터 해방후까지(태동기, 생성기)
옛 문헌에 우리 조상들은 삼국시대부터 짚따위나 마른 풀로 공을 만들어 중간에 벽을 쌓고 공을 차 넘기는 경기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걸 보아 족구의 역사는 1300년도 더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간스포츠 93년 5월 8일자 참조)

우리나라에서는 옛날부터 이미 장비된 시설과 규칙을 가진 규모있는 공차기가 다양하게 발전하고 있었으나 그것은 구문을
설치하는 방법에 따라 나뉘어지는데 그 중에 하나는 운동장의 중간에 하나의 구문을 세우고 양쪽에 갈라서 서로 공을 마주
차 넘기는 것이다.
운동장 중간에 두 기둥을 세우고 기둥의 아래부분에는 그물을 건너 쳐서 공이 지나가지 못하도록 하고, 두 기둥사이로
차 넘기는 방식이며, 차 넘긴 공은 그물에 걸리지 않고 바로 상대편으로 넘어가야 점수를 얻게 되었다.
이것은 대체로 오늘의 족구와 비슷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북한문화예술 1 "조선의 민속놀이" 푸른숲출판에서-삼국유사 기록을 풀이하여 출판)

2) 1960년대(과도기)
우리나라는 8.15 해방 및 6.25 사변이후 자주독립과 민주주의 재건을 위한 국방력의 보유가 절대적으로 요망되고
있었으며 1953년 7월 휴전 이후 1960년대 이전까지 군에서는 군 재정비 때문에 장병의 여가 차원의 체육활동에
관심을 가질 수 없었으므로 체육활동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① 우리 군의 재정비가 어느 정도 진행된 1966년 공군 제11 전투비행단 제101 전투비행대대 조종사들이 비상대기
업무를 수행하면서 간편히 조종복을 입은 채 할 수 있는 운동을 착안하여 대대 배구장에서 배구네트를 땅에 닿도록 내려놓고
축구공이나 배구공으로 인원에 제한없이 축구와 같이 손만 사용하지 못하고 몸 어느 부위나 다 사용하여 배구와 같이 3번에
상대편으로 차 넘기는 규칙으로 경기를 시작한 것이 최초의 군의 시작이었으며 1968년 5월 당대 소속 대위 정덕진(98.4.12
작고), 중위 안택순(98년 공군예비역소장)이 경기룰을 창안하여 국방부에 상신 최우수작품으로 선정되어 국방부 장관표창
및 부상(당시
30만원)을 받았고 국방부 산하 각 육군, 해군부대에 전파되었으며 국방부 발간 국군체육이란 각종 경기규칙을 기록한
책자에 족구라는 경기가 최초로 기록되었다.

② 육군에 전파된 근원이 당시 공군에서 운영하는 AGOS(공지합동작전학교)에 육군작전장교 및 하사관이 년 1,000명
정도 수료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휴식시간 및 점심시간에 족구를 하였다. 경기장이 필요없이 맨 땅에 물주전자로 금을 긋고
축구공이나 배구공 하나만으로 인원에 구애없이 간단히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많은 장병이 선호하다 부대에 귀영하여 전파되었다.


③ 해군은 당시 공해 합동작전회의라는 명칭으로 해군의 함장과 공군의 조종사 편대장 이상과의 년 1회 해군작전사령부
주최로, 1회는 공군작전사령부 주최로 친선모임을 실시하던 중 공군에서 족구하는 것을 관람하고 또 해군 함장과 공군
편대장들이 함께 시합을 하였고 사관학교 기수별로 또는 해군 대 공군으로 나누어 경기를 하였으며 해군 함장들이 해군에
귀영하여 족구 경기를 좁은 공간의 함상에서 또는 육지에서 실시하였다.

이렇게 하여 전군에 보급된 족구는 군복무를 마치고 각 기업에 취직한 사람들이(대표적으로 대기업 : 대한항공, 삼성,
대우, 현대 등) 군에서 하던 족구를 휴식시간에 아무런 준비없이 족구를 함으로서 오늘과 같이 전국의 700만 족구인
을 확보하게 되었다.
족구규칙 정립(예비역 공군 소장 안택순,공군사관학교비행교수 정덕진)

3) 1970년대(보급기)
1970년대 공군에서는 족구라는 명칭으로 정착하게 되었으며 각지역 및 직장마다 조금씩 다르게 경기방식과 경기규칙이
점차 발전하게 되었다.
공군 장병들은 주기장 및 유도로변과 막사 주위나 배구장 등 여러 장소에서 족구를 즐겨 해왔다.
처음으로 족구의 규칙이 게재된 책자는 1974년 1월 1일 국방부의 "체력관리"(공군본부 인사참모부
조흥식)이며 여기에서는 6인제의 족구규칙을 설명하였는데 불합리한 부분 즉 전위 센터위치가 수비장애가 되고 네트의 높이도
2미터나 되었으나 1978년 이때에 경기규칙은 4인제로 네트의 높이는 1미터, 넓이는
9×18미터(m)로 축구공을 사용하였으며 머리는 사용하지 않고 발만 사용하였다.
이후 전역한 군인들이 직장이나 대학에 복학하여 족구를 보급하였는데 국민적 정서에 부합하고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용이성과
다같이 참여하는 즐거움 때문에 급속도로 민간사회에 보급되었다.
6인조 족구는 많은 인원을 참가시키기 위한 목적을 위해 창안된 경기방식이었다. 하지만 족구경기는 배구와 같이 블로킹의
난이도 및 센타포드(네트앞 중앙)의 위치 때문에 수비방해가 문제되어 공군 장병들은 6인제보다 4인제 족구 경기방식을
더 선호하였다.
공군 제1비행단에서는 4인제 코트는 9 ×8미터(m)이며 머리는 사용하지 않고 무릎이하만 사용한다는 독자적인 경기규칙을
적용하여 족구경기를 하였으며 75년 이후 이 경기규칙이 전부대에 보급되면서부터 족구경기시 머리를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제1회 공군 참모총장기 족구대회(95년 11월)부터 공히 전국족구연합회 공식규칙을 전폭 수용(16 ×7m/110cm)하게
되었다.

4) 중흥기
족구의 체계적인 발전을 위하여 단체 설립이 절실히 요구되어 1990년 2월 (가칭)대한족구협회 발기인 모임을 가졌고
그해 4월 대한족구협회 창립 총회를 개최하여 초대 박 이성 회장을 선출했다.
5월 전국 각 지역에서 활동하던 족구지도자들이 모여 각기 다른 경기룰을 수차례 지역을 순례하면서 회의를 통하여 통합
경기룰을 완성하게 되었다.
6월 "90전국족구대축제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하여 전국족구인의 밤 행사를 성황리에 개최하고 7월 12일부터 7월 16일까지
올림픽체육관 체조경기장에서 전국에서 선발된 352개팀이 참가하여 대성황을 이루었다.
1991년 제2대 한 광수 회장 취임과 함께 서울시 사회단체로 공식 협회로 등록을 마쳤다.
1992년 제3대 전 상수 회장 취임과 "92한강사랑 전국족구대회를 개최하여 우승팀인 수원 삼성전자팀을 호주에 파견하여
족구를 세계화 시키기 위한 시금석을 마련했다. 1993년 EXPO 성공기념 전국족구대회를 개최하여 우승팀 구미 삼성전자팀을
일본 도오쿄에 파견하여 일본에 우리 민족이 창안한 족구의 우수성을 보급하였다.
1994년 전국직장인 족구대회를 개최 우승팀 기아자동차를 호주에 파견 호주지역 족구 활성화에 불길을 당겼다.
95년 11월, 제1회 공군참모총장기를 창설하여 대회를 성황리에 개최함으로 공군족구 활성화에 전기를 마련하였고, 제4대
회장에 신경식 (당시 국회문화체육공보위원장)을 선임하고 사단법인화에 정열을 쏟음과 동시에 제1회 문화체육부 장관기대회를
신설하여 9월 광주동신전문대에서 각 시.도 44개팀이 참가하여 대회를 치루며 S.B.S에서 예비 녹화를 할 수 있었고
기아자동차가 우승을 차지했다.
96년 11월 17일 공중파 방송사상 최초로 S.B.S를 통하여 80분간 족구 중계방송을 하게되어 족구활성화 및 대중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아울러 각 고등학교 전일 특활반에 족구강의를 무료로 실시하며 족구를 학교체육화시키는 전기를 마련하였다.

97년 8월 전국의 족구지도자들이 모여 족구의 특성을 살린 족구공 개발에 성공하였고 끝임없는 연구 개발결과로 족구화가
탄생 하여 특허를 취득했다.
10월 17~18일 전국족구대축제를 한강시민공원 반포지구에서 189개팀이 참가하여 대성황을 이루었고 사단법인 서류는
당시 사무국 관할 마포구청 및 서울시청을 거쳐 문화체육부에 접수시켰다. "97 전국족구대축제 우승팀인 기아자동차팀을
인솔하여 세팍타크로의 본고장인 동남아를 순방 태국의 유명한 세팍타크로팀과 경기를 가져 족구의 우수성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대한족구협회의 활동은 활발하고 적극적이었다.
한편 전국족구연합회도 국민생활체육협의회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장관기대회와 회장기대회를 치루며 활성화에 노력하였다.

대한족구협회의 사단법인화 추진을 계기로 인하여 두 단체의 통합이 절실히 요구되었고 다시 통합 작업을 추진하여 98년
2월 합의를 보고 3월 대의원 총회에서 정 덕진 회장을 선출함으로 완전 통합을 이루었다. 제3회 문화관광부 장관기
족구대회를 M.B.C 문화방송에서 취재하도록하여 화제집중이라는 프로그램에 약 15분간 방영하여 좋은 반응을 얻었다.
특히 전국대회 성적을 기준으로하여 1부 40강팀을 선정 1부팀은 리그전으로 대회를 치루어 난이도 높은 기술개발과 실력
평준화를 이룩하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심판자질 및 족구에 관한 족구강의록을 편찬하여 각 시.도로 배포하였고 심판양성에
정열을 쏟았다.
인터넷 족구 홈페이지를 개설하여 세계화에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1999년 5월 사상 처음으로 족구 단행본을 발간하여
보급하기 시작했으며 문화관광부 장관기를 성대히 치루었다.
5) 정착기
오늘날 국민의 열기와 정부의 생활체육 활성화 방안에 힘입어 많은 동호인을 양성해내고, 해외 교포사회까지 전파되는
등 민족 고유의 구기로, 대중스포츠로 자리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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